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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에 무게가 있다면 노란색은 파란색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어딘가에 적은 적이 있다. 꼬깃꼬깃 접힌 채
바닥에 떨어진 은행 나뭇잎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생각을 떠올렸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채, 온전히 바스러지지도 못한 채 바닥에 널부러진,
언젠가의 푸르른 기억들을 바라보기에 적당한 계절인 것이다. 그 기억들이 수시로 엉키며 뒹굴어 다니는 모양을 무심코 지켜보기에 적당한 계절인
것이다.
익사
어떻게 그녀의 엉덩이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어진 호박꽃 속으로
독벌이 기어 들어가 뿌리까지 마비시키듯이, 내 손은 그녀의 머리채를 따라 흘러내렸습니다 앞가슴
골짜구니에서는 그녀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으켜 드릴까요 그녀의 풍만한 영혼이
살며시 나를 업고 배꼽을 지나, 내장에 흐르는 레테 강물 속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내 몸이
퉁퉁 불어 떠오르기까지 십 년인가, 이십
년 쉴 새 없이 번개가 쳤습니다
이성복의 오래 된 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와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의 시들과
같은 아궁이에서 태어난 것들’인 시, 1976년부터 1985까지 씌어진 시들을 이 계절에 읽었다. 그 안에 스스럼없이 간직되어 있는 푸르름 혹은
수습되지 않는 천진난만하고 에로틱한 풍경들을 엿본 것 같아 간혹 민망하였다. 모든 지나간 것들이 떠오르는 가운데, 나는 대범해지기로
하였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첫사랑> 중
솔솔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일수록, 쓸쓸할수록 쓸쓸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하며 부감의 기억들이 전하는 통증을 참아내기로 하였다.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순한 어림짐작을 거부하는, 오욕의 방향으로 회전하는, 아니 딸꾹질처럼 잠시 멈춰서버린 이곳에서 기적처럼 살아내고 있는
스스로를 대견해 하기로 하였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였던 것과 한줌 손아귀 촉각까지 야무지게 보듬기로 하였다.
마음의 굴절
얇은 스테인리스 강철 자尺처럼 쭉 펼쳐졌다 어이없이, 휙 꺾이는 마음의 굴절
사랑이라 불리는 것들의 슬픔으로 해는 지고 몸은 붓고 뱃가죽은 떨고 머릿속 콩은 콩 볶는 듯이 뛰는도다
온전치 못한 거처에서는 마음조차 온전치 못하기 십상이므로 그 ‘굴절’에 굴절당하지 않기 위하여 애써 침착하려 하는 중이다.
밤조차 야위어가는 새벽녘, 산을 넘어 조문을 가는 사내의 심정에 드리워진 그늘처럼 차분해지기로 하는 중이다. 끊긴 길에 바투 들어선 옹벽,
장딴지 굵은 십장의 지시에 따라 마음의 높이로 세워진 벽 앞, 그날 낮 굴러 떨어진 돌 앞에서 무력하였던 사내가 돌 틈에 새겨져 있다.
고양이
어느 날 정말 손바닥만 한 작은 고양이가 밥집 유리문 앞에 잠든 것을 보았다 한두 방울 비 뿌려 보도 블록을 적시고, 떼서리로 몰려드는 밥집
손님들 발에도 밟히지 않고, 번지는 빗방울처럼 작고
동그란 잠을 고양이는 자고 있었다. 어느 날 패인 무덤 구르는
돌멩이 아래 우리가 그러하듯이
마음이 널을 뛰니 글이 중구난방이다. 몸이 무력하여 눈이 초점을 잃어가는 것을 손 놓고 지켜보고 있다. 나 없는 동안 낯선
방문객이 집에 다녀갔다. 고양이와 아내만 집에 있는 동안이었다. 잠시의 불안감이 여태 남아 고양이는 집 여기저기 울음을 쏟아내며 돌아다닌다.
고양이가 흘려 놓은 울음을 주워 담느라 아내도 덩달아 분주하다. 세상이 소란스러우니 기진맥진의 몸과 마음으로 책 한 권 정리하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이성복 / 어둠 속의 시 1976 - 1985 / 열화당 / 324쪽 /
2014 (2014)
1977년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한 시인 이성복(李晟馥, 1952- ).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후 지난해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 에 이르기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내놓은 그에게는 어느새 흰 머리카락이 수줍게 자리잡았다. 근 사십 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 쓰기의 외길을 걸어온 그가, 이제 지난 시간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시와 산문, 대담 들을 세 권의 책으로 엮어 선보인다. 1970-80년대 미간행 시들을 묶은 어둠 속의 시 , 마흔 해 가까운 세월의 다양한 사유들을 엮은 고백의 형식들 , 그리고 서른 해 동안 이루어진 열정적인 대화들을 모은 끝나지 않는 대화 가 바로 그것이다.
1976
볼모의 시 / 정든 유곽에서 / 검시(檢屍) / 시월에 흩어진 노래 하나 / 시월에 흩어진 노래 둘 / 시월에 흩어진 노래 셋 / 시월에 흩어진 노래 넷
1977
연가 / 꿈결에 / 익사 / 배신 / 명상 / 황홀 / 제망매가 / 시인 / 자화상 / 백치 / 어느 상대주의자의 고백 / 아이의 울음 / 친화력 / 내가 모르는 말 하나로부터 / 성탄미사 / 노인
1978
유년, 1959 / 소년시절 / 거리에서 하나 / 거리에서 둘 / 아크로바트 하나 / 아크로바트 둘 / 돌아오지 않는 강 / 1978년 10월 / 모래내 시편 / 물개 뛰노는 북양北洋 넓은 무덤에 마음아, 언제 가려니? / 몸
1979
시 / 글짓기 하나 / 글짓기 둘 / 안개 속에서 나는 왜 행복한지 몰랐다 / 마야를 생각하며 / 나의 삶은 / 이 많은 괴로움 / 초토일기 하나 / 초토일기 둘 / 초토일기 셋 / 초토일기 넷 / 눈 / 사내 / 찬가 / 치욕을 위하여 / 꽃피는 아버지 하나 / 꽃피는 아버지 둘 / 꽃피는 아버지와 아픈 아들 하나 / 꽃피는 아버지와 아픈 아들 둘 / 수색통신(水色通信) / 사월의 편지 / 애인들 / 연애는 안 되고 / 첫사랑 / 어린이를 위하여 / 성(性) / 미국 / 미국 군함 위에서 / 이모 / 시장에서 / 병장 천재영의 사랑과 행복 하나 / 병장 천재영의 사랑과 행복 둘 / 병장 천재영과 그의 시대 하나 / 병장 천재영과 그의 시대 둘 / 나는 이 도시에서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보았다
1980
작은 노래 / 겨울 아침 / 명절 / 기해일기(己亥日記) / 깻잎 위에도 피 냄새가 지나갔다 / 그날 이후 / 산정(山頂) / 생일 / 그날 갈보리에 / 죽음의 서(書) 하나 / 죽음의 서(書) 둘 / 데살로니카 후서 하나 / 데살로니카 후서 둘 / 데살로니카 후서 셋 / 데살로니카 후서 넷 / 데살로니카 후서 다섯 / 투혼 하나 / 투혼 둘 / 불빛 / 뉘우침 / 절망 / 슬픔에 대하여 / 치욕을 향하여 / 그것 / 나는 종달새 새끼 / 그 몸으로 /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므로 / 나는 가나다 말도 못다 닛고 / 나사로야, 나사로야 일어나 밥 먹어라 / 언젠가 내가 / 푸른 개들을 위하여 / 천주의 어린 양 / 혼례
1981
산요 면도기 / 중학생 / 산행 / 기차 / 그리고 나, 당나귀는 곧 팔려 갈 예정이었다 / 베다니에서 / 죽음의 집의 기록 / 행복에 대하여 / 분지 일기 / 늙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 헤수스 산체스의 쉰여섯 개의 슬픔 / 아침에 / 아내 / 어머니 / 유월절(逾越節) / 예비군 / 토굴
1982
마음의 굴절 / 큰 것은 슬프다 / 생일 / 어쩌면 그런 일이 / 때로 그것이 / 치욕에 대하여 / 다방 나그네에서 / 변경(邊境)에서 / 예레미아 서(書) / 그날 저녁 / 임종
1983
명륜동에서 / 변절 / 고양이 / 파리떼 / 선풍기 / 아이를 안고 / 노파들 / 외식 / 신혼여행 / 겨울 고스톱 / 목욕 / 청명 / 수난 / 그 여름의 끝
1985
환청 일기 / 오늘 오후에 / 소설 / 꽃피는 아들 / 꽃피는 어머니 /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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