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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4

pdhgdty 2024. 2. 9. 21:36


세종의 치적을 한 권의 책 으로 쓰는 건 무모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재위 기간 31년 동안 하루도 공부 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범생이 임금 이 바로 세종이었고, 그 때문에 이룬 업적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종이 키운 집현전 학사들 을 비롯해서 수많은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나랏일 이 빈틈없이 돌아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군과 공주 들 까지도 재능에 맞게 일을 시켜서 조선 이라는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 무던히도 노력하던 성군이었다. 이는 형제들을 죽이고 억압해서 왕위에 오른 아버지 태종과는 다른 방법으로 왕실의 힘 을 보여주고,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잘 엿보인다. 이런 상황은 세종이 아직 건강을 크게 잃지 않고 세자인 문종이 든든하게 보위를 지키고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왕실에 초상이 잇다르고 끝내는 어린 단종 홀로 궁궐을 지키는 형세가 펼쳐지자 일찌감치 궐밖으로 쫓겨나 잠저생활 을 하며 조용히 있어야 할 성장한 대군들이 궐내 출입을 하며 단종 을 위협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5권에서 다루고자 한다. 암튼,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종은 상왕 에 올라 병권 과 인사권 을 쥐고 나머지는 세종이 처리하도록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건 세종 을 흔들 신하들이 남아 있다면 남김없이 처리해주고 왕권 강화 를 더욱 확고히 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병조판서 강상인이 처절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강상인의 말실수 였다. 옛날에는 임금이 사람을 부릴 때 쓰는 패 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패 를 보여주며 왕명을 전달하는 등의 용도로 쓰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강상인이 태종 앞에서는 이 패의 용도 가 [대신]을 부를 때 쓰는 것이고 말하니, 태종이 자신에게는 필요없는 물건이라 세종에게 갖다주라하였고, 세종 앞에서는 [장수]를 부를 때 쓰는 것이라고 말하니, 세종이 자신에게 필요없는 물건이라며 태종에게 다시 갖다주라 하여 벌을 받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이를 빌미로 병조판서 였던 그를 천민인 관노 로 신분강등이라는 중벌을 내렸다. 누가 보더라도 상왕의 힘 이 아직 건재하니 함부로 까불면 다친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다.허나 태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강상인을 다시 국문해서 끝내 사형까지 시켜버린다. 그 까닭은 세종의 장인 인 심온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태종은 자신의 아내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아들의 장인 가문도 똑같이 만들기 위해 강상인 을 끌어들인 셈이다. 한다면 하는 태종의 성격 상 끝내 자식의 외척 마저 쑥대밭으로 만들고서 왕권 강화 에 화룡점정을 찍는 듯 했다. 도대체 태종은 왜 이렇게까지 외척의 발호 를 걱정했던 걸까? 박시백은 태조 이성계가 외척의 농간 에 넘어가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었던 탓이라고 해석했다. 역대 왕조국가 에서 외척세력이 왕권을 넘보는 일은 비일비재 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우려는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에서도 이자겸의 난 에서 보여지듯 외척세력이 날뛰는 일을 빌미로 삼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심한 일 아니었을까? 왕조국가에서 [왕권 vs 신권]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고, 신권이 강할 때에는 왕실과 종친들 이 힘을 합세해서 대결한 예도 얼마든지 있는데, 외척 가문 을 그토록 짓밟아버리면서 다른 염려는 없었던 걸까? 하긴 태종은 단종 이 처할 고립무원의 상황 을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임금이 왕위에 오르면 대비(어머니) 가, 대비가 없으면 태대비(할머니) 가 수렴청정을 하며 정국이 안정될 때까지 어린 임금을 보호해줄 터인데, 단종에겐 그런 어머니도, 할머니도 살아계시질 못했다. 이래저래 이방원의 업보 는 대를 이어 계속된 듯한 느낌 뿐이다. 태종이 죽고 난 뒤에 세종은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간다. 태종이 왕권 강화 에 노력한 덕분일까? 아니면 세종이 임금 자질이 뛰어난 덕분일까? 어쨌든 세종은 자기만의 스타일 로 신하들을 부려먹으며 위대한 성군으로 성장해간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대부분 결실을 맺고 말이다. 세종의 업적을 나열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다. 이토록 놀라운 업적을 남겼으니 세종의 치세 는 분명 태평성대 가 틀림없을 거라고 믿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실록>에는 세종의 치세에도 굻어죽는 백성들이 넘쳐났으며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원망의 목소리와 반란의 조짐까지 있었다고 적혀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태종과 세종이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나라 안팎으로 큰 문제들을 해결하며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은 틀림없지만, 임금 하나 잘났다고 만백성이 배 부르고 등 따순 일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사각지대 는 반드시 있고, 불쌍하고 원망 많은 백성은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폭군이 다스리던 시절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수였을 테지만 세종 때에는 엄청나게 많은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바로 사민정책 이다.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 그리고 이징옥으로 이어진 4군 6진 개척 이 거의 완성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훗날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에서 토문강 을 우리는 송화강 으로, 청나라는 두만강 으로 해석해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백두산 줄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을 염두에 두고 싶지만, 조선 초기만해도 야인들(여진족) 이 만주지역에 드문드문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쪽까지 영토확장을 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여튼, 세종은 북방개척의 의지 를 확고히 하였고, 야인들을 몰아낸 우리땅 에 우리 백성들이 터전을 이루어서 영원히 정착을 하고자 백성들을 적극 이주시켰다. 그런데 이것이 백성들의 원성을 받는 원인이 된 셈이었다. 따뜻한 남쪽에 살던 백성을 억지로 보냈으니 달가울 까닭이 없었고, 먼 타지로 가려는 백성이 없으니 죄인들 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너무나도 춥고 척박한 땅이라 제대로 터전을 일구기 너무나도 힘든 곳이었던 탓에 백성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야인들의 약탈과 살인에 방치되거나 도망가다 잡혀 죽는 등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세종은 고집을 부렸다. 지금 야인들을 내쫓고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골치를 썩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그 당시 세종의 판단이 옳았음을 잘 알지만, 그 당시 백성들이 당했던 고초를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이렇게나 원망이 컸던 탓일까. 세조 때 사민정책 을 폐지하고 만다. 이밖에도 세종이 원망을 들었던 정책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정책 과 화폐 유통을 위한 저화 발행 이 있다. 조선 초기의 사대주의는 비굴한 자세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 로 분명히 밝혔듯이 명나라가 고까운 짓을 한다면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정책이었건만, 태종과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전쟁을 억지할 수 있다 면 수모를 참아주는 정도로 살짝 저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왜냐면 태종과 세종이 적장자 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를 사람을 대신해서 오른 임금이었기에 명나라가 트집을 잡는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기 악화일로에 빠질 수 있기에 일정 정도의 횡포가 있더라도 참아주고 견뎌내는 쪽으로 일관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죽을 맛 은 백성들이었다. 명나라 칙사가 압록강을 넘음과 동시에 벌어지는 잔치 비용 을 고스란히 백성들이 감당할 몫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칙사가 뇌물과 공물을 요구라도 하면 태종과 세종은 군말없이 들어주곤 했는데, 그 때문에 그 양이 점점 늘어서 백성들의 고통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망은 고스란히 임금에게로 향했고 말이다.또 하나의 원망인 저화 는 종이돈 을 말하는데, 똑똑한 세종은 화폐의 유용성 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화폐 유통 을 장려하려 했던 모양이다. 허나 백성들 대부분이 농민이고 자급자족 을 하는 마당에 상품 소비 가 활발히 일어날 까닭이 없을 뿐더러, 대대로 상인과 공인 을 천시하는 풍조마저 널리 퍼져있는데 누가 자발적으로 물건을 파는 상인이 되고, 만드는 공인이 되려 하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세종은 끊임없이 화페 유통 을 밀어붙이며 화폐 를 쓰지 않고 물물교환 을 시도하는 백성들을 잡아다 벌을 주었고, 벌이 무서워 화폐 를 소유하면 얼마 가지 않아 화폐가치 가 폭락해서 애써 모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종잇조각 이 되고 마니 백성들은 이래저래 죽을 맛 이었던 셈이다. 이런 까닭에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 시절에도 임금을 욕하는 백성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지적인데, 박시백이 굳이 이런 내용을 책에 쓴 까닭을 읽어보니, 너무나도 훌륭하고 뛰어난 업적이 많은 세종 이니만큼 그 반대 성격의 기록 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균형 을 맞추려 하였다고 밝혔다. 물론 이해는 된다. 반듯한 성군의 이미지 에 반전을 주는 기록 도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을 말이다. 그러나 요즘 같이 기레기 와 친일적폐 들이 날뛰는 시절에는 그닥 맞지 않는 기획이라고 보여진다. 이 책이 처음 쓰인 때가 2005년이라 십분 이해가 되고, 개정판이 나온 시점도 2015년이라 그렇게 균형잡힌 시각 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길 때였기 때문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허나 그런 기획의도라 할지라도 기왕이면 세종의 업적 을 더욱 휘황찬란하게 나열한 뒤에 하였으면 좋았으련만, 이 책은 균형 만 맞추려다 세종의 실책 만 강조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균형 잡힌 기획 은 이후의 책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성군의 반전 과 폭군의 반면 이 절묘하게 크로스한다고나 할까... 물론 이러한 반전 기획 이 의외로 인물의 진면목 을 살피게 해주기도 한다. 황희 정승 의 경우다. <야사>에도 곧잘 등장하는 황희 정승 은 어진 임금인 세종을 늙을 때까지 보필하는 명재상의 이미지만 남아 있지만, <실록>에서 보여지는 황희 정승 은 꽤나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록 본인이 직접 저지른 비리 와 부정 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이 저지른 잘못 을 벌주기보다는 제 식구 감싸 듯 살인을 저질러도 청탁으로 무마하여 들고, 권위를 남용하고도 없던 일로 덮으려 하고, 심지어 궁궐의 재산을 함부로 빼돌리다가 들통이 나는 등 망신살이 제대로 뻗치는 일을 참 많이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종은 그런 황희 를 끝까지 신임하고 곁에 둔다. 오늘날 같으면 당장 비난 받기 일쑤였겠지만, 그만큼 황희 가 큰 정책에 있어서는 넓은 안목 과 과감한 결단 을 보여주며 세종 때의 크나큰 업적 달성을 이룰 수 있는 역량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 때문에 역사 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예를 보여주는 것일까? 암튼, 박시백의 역사해석 은 생각할 꺼리를 많이 주는 까닭에 즐겁다. 허나 세종에서 문종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참 암울할 정도다. 이후에 벌어진 단종의 비극 을 예고하는 듯한 일들이 참 우울하게 만들고, 세종을 꼭 닮은 문종과 단종의 재능 이 빛을 보기도 전에 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세자 시절만 30년이었던 문종 은 세자 시절에 이미 임금의 역할 을 수행하고 있었고, 세종이 죽기 전인 8년 간 은 몸져 누운 날이 더 많았던 세종을 대신해서 임금의 자리 를 굳건히 지켜낸 준비된 임금 이었다. 허나 그런 성군의 자질 을 갖춘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할 줄이야 누가 알았던가? 더구나 할머니, 어머니도 없이, 혼인도 채 치루지 못한 단종 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줄은 아무도 몰랐으리라. 더구나 성군의 자질 은 단종에게도 보였다. 열두 살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홀로 구중궁궐을 지키면서도 칭얼대거나 반항하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는 단종 이었다. 오히려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키고 수많은 대신들을 아래에 두고 논리정연 한 말솜씨로 나라를 다스리니, 만약 이대로 몇 년만 더 나랏일을 배우며 왕권 을 안정시켜 나갔더라면 틀림없이 세종 못지 않은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권은 이렇게 어린 단종 을 남겨두고 세종과 문종이 모두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하였다.
300만 독자와 만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새로운 출발

조선사가 지식인 문화에 머물고 대중들에게는 아직 생소했던 시절, 조선사로 가는 길목을 시원하게 열어준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이 있었다. 2001년을 시작으로 10여 년을 조선사에만 바쳤던 박시백 화백은 방대한 분량과 편년체 서술로 아무나 접근할 수 없었던 조선왕조실록 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만화로 재탄생시켰다. 성실한 고증과 탄탄한 구성, 명쾌한 자기만의 시각을 통해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렸다는 평을 받으며 독자층을 넓혀가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은 완간과 함께 독자의 환호를 받았다. 조선사 입문의 대표 도서로 자리 잡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은 더 많은 독자와 만나 조선왕조실록 이 명실상부 우리 사회의 필수교양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새롭게 출발한다.


개정판에 부쳐 4
머리말 6
등장인물 소개 10

제1장 임금 위의 임금
이중권력 14
계속되는 왕비가의 수난 20
대마도 정벌 31
모두 이루었으나 41

제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새 임금 길들이기 48
홀로 서는 세종 55
세종의 철학 64
새로운 카리스마 70
사대외교의 설움 80

제3장 백화만발의 시대
학문의 융성 94
과학기술의 도약 99
두 천재 음악가 106
북방 개척의 시대 1 114
북방 개척의 시대 2 123
세종어제훈민정음 130
세종 시대의 백성 137

제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황희 정승 146
과학혁명의 주역들 155
북방의 영웅들 160

제5장 준비된 임금, 문종
성군을 위한 준비 170
비극의 서막 174
말년의 세종 183
어린 단종을 남기고 195

작가 후기 202
세종 · 문종실록 연표 204
조선과 세계 210
Summary: The Annals of King Sejong and King Munjong 211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212
세계의 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214
도움을 받은 책들 215